왜 우리는 전례 시작과 마칠 때 십자성호를, 강복할 때 십자표를 긋습니까?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제가 손을 들어 십자표로 교우들에게 강복을 준다든지 또는 성체로써 강복을 줄 때마다 교우들의 손은 벌써 이마로 올라가고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십자가의 표로써 강복을 주는 것은 신약시대에 있어 모든 강복은 그리스도의 강복이라는 것을 늘 주지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옛 이교 백성들은 그들의 제관들의 손 자체에 강복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사제의 손은 그 자체에 축복의 힘이 있지 않고 십자가와 그리스도교 제대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십자가상 제사의 재현인 미사성제보다 더 풍부하고 고귀한 축복은 없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미사) 안에서 바로 주님의 십자가는 늘 새롭게 또 신비롭게 우리 가운데 세워지며 십자가의 축복이 믿는 이들에게 내려집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축복’이 계속적으로 내리는 그리스도의 삶의 실재입니다.

미사 자체가 축복입니다. 미사는 믿는 이들이 매일 또는 적어도 매 주일마다 받는 큰 축복입니다. 보통 일상생활 중에서도 십자성호로 축복을 받는다면, 미사 중에 반복되는 십자표를 통하여 우리 위에 십자가의 축복을 내리도록 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동방 교회 미사 전례에 참여해보시면 동방교회 신자들이 미사 중에 목례와 곁들여서 큰 십자성호를 (바른쪽에서 왼쪽 어깨로 긋는) 거의 쉴 사이 없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는 미사 중에 이러한 십자성호의 반복은 생소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적어도 미사의 중요한 대목에서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우리는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미사를 시작하고 십자성호로 미사를 끝맺습니다. 첫 번의 십자성호는 사제와 함께 모든 이가 미사 전례를 시작할 때 그으며, 마침 십자성호는 제단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 주는 강복 때 긋습니다. 강복은 사제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강복을 청할 뿐입니다. 또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주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러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이마와 입과 가슴에 작은 십자가를 긋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마음을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희소식으로 항상 흠뻑 젖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지혜로써 깊이 깨닫고 그것을 우리 입으로 선포하며 마음에 새겨서 실천해야 한다는 다짐이라 하겠습니다.

십자나무에 우리의 구원이 달렸다고 교회는 노래합니다. 제사의 최종적 표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는 증표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경신례 때에 십자표를 하는 것은 ‘주님, 저의 육신과 영혼, 생각이나 말, 마음과 느낌, 저의 전 존재를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에서 용솟음치는 축복으로 충만케 하소서. 또 저를 당신의 희생과 승리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신뢰로 이끌어 주소서’ 하는 의미입니다. 마치 옛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유요 자기들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자기 동물들의 귀나 가죽에 불로 지져서 표를 하였듯이, 십자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에게 온전히 속해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성호는 우리가 그리스도 신자라는 가장 간단한 고백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기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시작과 맺음에 십자성호를 그으며 축복을 구합니다. 이처럼 십자표는 축복을 받는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그을 때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십자가를 긋지 말고 정중하고 침착하게 정성들여 그읍시다.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십자성호에 대해 감동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길지만 원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십자가의 표시인 성호를 그을 바에야 제대로 옳게 긋자, 그저 아무렇게나 서둘러 남이 보아도 무언지 알아 볼 수조차 없이 해서야 쓰겠는가. 아니다. 올바른 십자성호를 긋도록 하자. 천천히, 시원하게, 이마에서 가슴으로, 이 어깨에서 저 어깨로. 이렇게 하다 보면 온몸이 십자가의 표시와 하나가 됨을 느끼게 된다. 이마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어깨에서 어깨로 그어나가는 성호에 모든 생각과 정성을 쏟으면 십자성호가 몸과 마음을 감싸주면서 나를 거두고 축복하고 거룩하게 함을 절로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십자가의 표시가 우주의 표시이고 구원의 표시인 까닭이다. 우리 주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 사람을 그 골수에 이르기까지 성화하시는 일 또한 이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올리기에 앞서 십자성호부터 긋는 것이다. 그것은 성호가 우리를 다스려 마음과 뜻을 하느님께로 돌려주기 때문이다. 기도를 드리고 나서 성호를 긋는 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바가 우리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유혹을 당할 때면 우리를 굳세게 해주도록, 위기에 처할 때면 우리를 감싸주도록, 축문을 외울 때면 하느님 생명의 풍만함이 우리 영혼도 온갖 결실과 강복으로 채워주시도록 성호를 긋는 것이다.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임을 명심하기로 하자. 그리고 성호를 제대로 긋자. 천천히, 시원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그렇게 하면 십자성호로 인해 나의 몸가짐과 마음가짐, 생각과 뜻, 마음과 느낌, 동과 정,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능으로, 천주성삼의 이름으로 힘을 얻고 표시되고 축성됨을 볼 수 있다.”(거룩한 표징,13-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