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과 삼위일체(三位一體)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다르다. 특히 오늘날 ‘믿음’을 말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의 경험, 곧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전부라는 사고방식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에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고 무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믿음을 가능하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2-15).
<삼위일체 예화>
하루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하면 잘 깨닫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하면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 백사장에서 아이들 세 명이 역시 하루 종일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놀고 있었다. 성인이 가까이 가서 “애들아, 너희들 무엇을 하고 있어"라고 묻자, 아이들은 “우리들은 저 바닷물을 이 모래성에 모두 퍼 담으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성인이 웃으며 다시 “애들아, 너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일은 못 끝낼 것이야"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그래도 선생님께서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쉬울 거예요"라고 답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바닷가에서 돌아와 5시간 동안 삼위일체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자, 저는 지금까지 인간의 말을 총동원하여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의 하느님이라는 삼위일체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이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1. 신앙의 신비로서의 삼위일체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용어에서「위(位)」라는 개념은 희랍어 persona-가면(假面)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가면극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役)의 연기를 한다.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언제나 그이지만, 그는 자기가 쓴 가면의 역할에 따라 매번 다른 연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 있어서도 그 상황은 비슷하다. 사람은 시간과 장소, 자격이나 주어진 소임의 성격 등등에 의해 각기 다른 호칭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또 다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 분의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한 분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이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신비이다. 은총을 통해 우리는 삼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났다(루카 3,22).
계시된 삼위일체 신비는 초기 교회 때부터 신앙의 근원이었다. 곧 교회는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왔고, 설교나 교리교육, 교회의 기도 안에 삼위일체 신앙을 담아 왔다. 교회가 삼위일체 신비를 교리로 확정한 것은 삼위일체 신앙을 왜곡하려는 교회 안팎의 도전에서 이 신앙을 지키고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는 ‘실체’, ‘위격’ 등 다소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삼위일체 신비를 교리로 확정하였다. 교회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앙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세 분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분되지만 오직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실체이시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어야 다른 중요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는 하느님의 아들이 육체를 취하셨다는 것, 그분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 여러 위(位)가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성부로부터 보냄 받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참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2. 구원 역사에서 드러난 삼위일체
영원하신 성삼위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추상적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는 모든 행위로 보여 주셨다. 성부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자께서는 성부께 파견되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밝혀 주셨으며,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깨닫게 하여 주시고, 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교회는 예로부터 “한 분 하느님 성부에게서 만물이 비롯되었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며, 한 분 성령 안에 만물이 존재한다.” 하고 고백하여 왔다. 이렇게 삼위께서는 인간 구원 역사에 개별적으로 활동하셨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전체는 삼위의 공동 활동이다.
구원 계획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업적은 성부와 성령의 공동 사업이며, 성자와 성령의 사명 전체는 성부께서 때가 찼을 때 이루시려고 창조 이전부터 사랑하시는 당신 성자 안에 미리 세우신 당신의 선의(에페 1,9)이다.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세 위격의 공동 사업이며 동일한 작용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피조물의 세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시며, 각 위격은 자신의 개별적 특성에 따라 공동의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 전체를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사명이면서 동시에 개별 사업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중심으로 다시 설명한다면,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성부께서 그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며(요한 6,44), 성령께서 그를 움직여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로마 8,14).
3. 구약 안에서의 삼위일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이 직접 언급되는 적은 없다. 구약성경은 유일하신 하느님이 계심을 분명하게 선포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일부 선포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느님께 여러 위가 계시다는 말은 없으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관해서도 계시하는 바가 없다. 하느님은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당신께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계시헌장 2-4).
구약성경에도 하느님께는 구별되는 위격들이 계시다는 것을 희미하게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듯한 구절이 몇 개 있다. 하느님을 복수 대명사로 표현한 창세 1,26의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든가 하느님의 신성을 구별하는 “지혜, 말씀, 영”이라는 특정한 칭호들이 그것이다.
4. 신약 안에서의 삼위일체
삼위일체 신비는 신약성경에서 실제로 계시된다.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될 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하고 삼위의 신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오며 삼위께서 동시에 현존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실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하심으로써 세 위격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이 임박하였을 때 제자들에게 성자이신 당신은 성부께 보냄을 받으신 분이며, 당신이 올라가시는 대신 성부께 청을 드려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17. 29-35)라고 하시며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제자들을 위하여 바치신 기도(요한 17장)에서도 예수님과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5.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신앙고백의 절정이다.
1) ‘삼위일체’ 신앙을 요약한 ‘신앙 고백문’
① ‘성호경’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신비에 대한 고백이다.
십자가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인 ‘성호경’은, 그리스도인이 입으로 외우는 기도문 중 가장 짧은 기도이지만, 그 사람이 가톨릭교회 신자임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지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② ‘영광송’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온 삶을 다해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온 세상이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바치는 기도이다. 영광송을 바칠 때에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표시로 머리를 숙인다.
③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의 충실한 요약이다. 우리가 믿는 바를 요약해 놓은 사도신경(信經)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전례 안에서 삼위일체 신앙 고백
① 세례 때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 우리는 세례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며, 그분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② 미사 시작 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③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강림, 삼위일체 신비를 묵상한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람을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알 수 있으며, 성령 강림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성부께 근원을 둔 넓고 깊은 이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더욱 잘 드러난다.
6. 삼위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친교
실제적으로 구분되지만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지니시고 한 본체를 이루시는 삼위께서는 긴밀한 사랑의 친교를 이루시며 사람들을 그 사랑의 친교에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 하시며 우리를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초대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비가 알아듣기 힘들지라도 기도에 정진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익혀 가면, 우리도 영원하신 성부와, 그분의 아드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커져 갈 것이고 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일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삼위일체로 한 분이시다. 삼위일체는 한 분 하느님께서 서로 구분되시면서 완전히 동등하신 삼위이시며 친밀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말한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일치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우리도 서로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바칠 때에도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다.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길 역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이르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비’는 사람을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이다. 이 신비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열어 보이고 내어 주시는 당신 사랑의 신비를!
사도 요한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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